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으면, 내 마지막은 내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을 내가 결정하려면 — 지금 준비해야 하는 이유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으면, 내 마지막은 내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아직 건강하니까, 아직 때가 아니니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자꾸 미룹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짐을 꾸립니다. 중요한 시험 앞에서 준비를 합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를 먼저 그립니다. 그런데 유독 삶의 마지막 장면만큼은, 아무 준비 없이 맞이하려 합니다.

정작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아무 말도 남겨두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은 본인이 아닌 가족의 손으로 결정됩니다. 어떤 치료를 받을지, 재산은 어떻게 나눌지, 장례는 어떻게 치를지. 내가 평생 살아온 삶의 마지막 장면이 정작 내 의사 없이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슬픔과 혼란 속에서 아무도 정답을 모르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 자리에 있어본 사람은 압니다.

웰다잉은 감동적인 마무리가 아닙니다. 지금 건강할 때 해두는 준비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많고, 준비한 사람은 드뭅니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7년이 지났습니다. 2024년 12월 기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누적 등록자는 32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한 주에 평균 1만 2천 명이 새로 작성하는 속도로 늘고 있습니다. 숫자만 보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19세 이상 전체 국민 중 아직 93% 이상이 아무런 법적 의사 표시를 해두지 않은 상태입니다. 열 명 중 아홉 명은 마지막 순간의 결정권을 스스로 쥐고 있지 않은 셈입니다.

연령대를 보면 격차가 더욱 뚜렷합니다. 70대 여성은 인구 대비 31%가 의향서를 작성해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습니다.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하거나 건강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준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반면 60대 남성의 비율은 이보다 크게 낮습니다. 아직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불편한 것인지 모릅니다.

연명의료 결정 현장에서 환자 본인이 직접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비율은 2024년 4분기 기준 52.5%입니다. 제도 도입 초기 35.1%에서 꾸준히 올라온 수치이지만, 여전히 절반 가까이는 본인 의사가 아닌 가족 전원 합의로 결정됩니다. 가족이 없거나 합의가 어려운 경우에는 연명의료 중단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도 생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준비 없이 맞는 마지막은 이렇게 달라집니다

의료 결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언장 없이 사망하면 법정 상속 절차에 따라 재산이 나뉩니다. 본인이 평생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고 싶었어도, 법은 그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고, 이 과정에서 가족 간 갈등으로 번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자필 유언장은 공증 없이도 효력이 인정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전문을 자필로 쓰고, 날짜와 성명, 도장 세 가지를 모두 갖춰야 합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무효가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루면 영영 못 쓰는 경우가 생깁니다.

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 입원 치료가 시작됐을 때 어느 보험에서 어떤 항목을 청구해야 하는지 가족이 모르면, 받을 수 있는 보험금을 받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내가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납입해온 보험료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족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넘어가버립니다.

재산과 금융 정보를 정리해두지 않으면, 가족은 고인의 계좌가 어디에 있는지, 부동산 등기는 어디에 있는지, 연금은 어디서 받는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복잡한 행정 절차와 씨름해야 하는 가족의 고통은, 미리 준비해둔 목록 하나로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보건소, 의료기관, 노인복지관 등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등록기관에서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일부 주민센터도 등록기관으로 지정된 곳이 있습니다. 신분증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거동이 불편하다면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됩니다. 경로당이나 노인복지관, 요양시설로 상담사가 찾아와 작성을 도와주는 방문 서비스가 운영 중입니다. 내 근처 등록기관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lst.go.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작성한 의향서는 언제든 변경하거나 철회할 수 있으니, 지금 생각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한꺼번에 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서대로 하나씩 처리하면 됩니다.

첫째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입니다.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작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재산과 금융 정보 정리입니다. 부동산 등기부등본, 금융 계좌, 보험 증권, 연금 수령 계좌를 파일 하나에 목록으로 만들어 가족 한 명에게 위치를 알려두는 것입니다. 인터넷뱅킹 계정이나 가상자산이 있다면 접근 방법도 함께 남겨둡니다.

셋째는 장례 방식 사전 지시입니다. 화장이나 매장 여부, 종교 의식 여부, 연락할 지인 목록, 부고 방식을 미리 적어두면 가족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본인 뜻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상조 상품에 가입되어 있다면 증권 번호와 연락처도 함께 남겨둡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록입니다. 살아온 이야기,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말, 감사와 용서의 표현을 짧게라도 글로 남겨두는 것. 이것이 남은 가족에게 가장 오래 남는 유산이 됩니다. 형식은 상관없습니다. 노트 한 장이어도 충분합니다. 오래 품어왔던 말 한마디, 고마웠지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 하나가, 남은 가족의 평생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설계하는 마지막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마지막 순간에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의료 결정권, 재산 분배 방식, 하고 싶었던 말. 이 세 가지를 끝까지 본인이 쥐고 있으려면 건강할 때 적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먼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이미 적어둔 그 한 장의 종이가 내 목소리를 대신합니다.

웰다잉은 죽음을 앞당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자기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설계하는 일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순간에 조금이라도 덜 힘들도록, 미리 손을 내밀어두는 일입니다.

감동적인 마무리는 결국 준비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준비는, 바로 오늘 시작할 수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독 인생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은 '이 네 가지'가 다릅니다

60대가 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 후회는 실수가 아니라, 멈춤에서 시작됩니다

"사주도 재산도 아니다" 故 이병철 회장이 말한 인복 넘치는 사람들의 특징 1위